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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요금에도 선택권을"...뉴질랜드의 에너지 실험,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 박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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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26
2025년 중반, 뉴질랜드는 전력 소비 구조에 있어서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맞는다. 단순한 요금 개편이 아니라, 전기를 쓰는 '시간'과 전기를 '공급하는 행위' 자체에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소비자를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에너지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초대하는 시스템의 시작이다. 이 변화는 거창한 기술 혁신이나 거대한 예산이 아닌, 소비자의 권리를 중심에 둔 정책 설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전력청(Electricity Authority)과 상업위원회(Commerce Commission)는 시장 점유율 5% 이상의 전력 소매업체에 대해 시간대별 요금제(time-of-use pricing)를 의무화하는 새 규정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뉴질랜드의 전력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Contact, Genesis, Mercury, Meridian 등 4대 업체는 피크 시간대와 비피크 시간대를 구분해 요금을 차등 적용하게 된다.
비피크 시간대는 보통 야간, 낮 시간대, 주말 등 상대적으로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으로, 이때 전기를 사용하면 보다 저렴한 요금을 적용 받는다. 이는 단순한 절약을 넘어, 전력 수요를 분산시켜 전력망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고, 탄소배출 감소에도 기여하는 중요한 전략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소비자의 선택권'이 있다.
한편, 이 정책의 또 다른 축은 태양광 발전과 관련된 ‘공정한 보상’이다.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 시스템을 갖춘 가정이 피크 시간대에 잉여 전력을 그리드에 공급하면, 그 기여에 합당한 환급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는 태양광으로 남은 전력을 전력회사에 공급해도, 실질적인 보상이 미미하거나 절차가 복잡해 체감 혜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태양광 발전이라는 ‘개인의 친환경 실천’이 국가 전력망에 도움을 주는 구조로 전환되며, 이는 다시 소비자의 전기요금 절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는 에너지 정의(energy justice), 즉 누구나 공평하게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권리에 대한 실현이기도 하다. 전력청 안나 코미닉 위원장은 “이제 소비자들은 단순한 전기 사용자에서 벗어나, 전력 공급 방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전환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 역시 RE100,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을 외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소비자의 자율성과 참여를 중심에 둔 전력 체계는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다. 시간대별 요금제는 일부 시범 운영 중이지만, 대다수 국민은 자신의 전기요금이 어떻게 책정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스마트 미터(AMI)의 보급률도 높지 않아, 실시간으로 사용량을 확인하고 효율적인 소비 패턴을 설계할 기반이 부족하다.
태양광에 대한 보상 체계 역시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잉여 전력을 한전에 팔 수 있는 구조는 있지만, 실제 단가는 낮고, 신청 과정도 복잡해 자가발전 소비자의 체감도는 낮다. 가정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남는 전력을 되팔며, 피크 시간대를 피해 소비하는 삶은 아직 한국에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간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공급 안정성과 가격 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소비자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설계가 중요해 진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뉴질랜드의 이번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비자가 전기차를 언제 충전할지, 세탁기를 언제 돌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보상받는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구조. 이것이 진정한 에너지 민주주의다.
뉴질랜드의 이 작은 변화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시민을 신뢰하는 정책이라는 점 때문이다. 전력 사용을 둘러싼 선택을 정부나 대기업이 통제하는 대신, 시민 개개인에게 넘긴 것이다. 마치 “이제 여러분이 정하세요”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그 신뢰에 기반한 선택이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지구를 살리며, 동시에 요금을 줄여주는 시스템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전기를 언제 어떻게 쓸지 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태양을 담은 옥상 위 작은 패널 하나가 가정의 경제에 보탬이 되며, 나아가 국가 전체 전력망을 지탱하는 날. 그날은 소비자를 에너지 정책의 '주인'으로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한겨울 밤, 크라이스트처치의 조용한 주택가에서는 식기세척기의 작동 소리와 함께 전기차가 천천히 충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작은 도시의 시민들은 말없이 거대한 전력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잡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벽 너머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가?
한국이 에너지 전환을 향한 여정에서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더 넓은 신뢰다.
출처 : 시민포커스(http://www.simin119.com)
뉴질랜드지회 박춘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