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글로벌 기자단 소식
소리를 듣는 기술, 장(腸)이 말하는 언어를 읽다
- 박춘태
- 28
- 07-26
뉴질랜드 오클랜드 바이오엔지니어링 연구소(Auckland Bioengineering Institute)의 연구팀은 최근 눈에 보이지 않는 몸속의 신호를 ‘보이게’ 만드는 기술로 세계 의료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 위장관(Gastrointestinal tract)의 전기생리학 및 운동성에 대한 지도화(mapping)를 가능하게 하는 다채널 장치의 개발과 응용이다.
언뜻 듣기에는 복잡한 학술 용어들로 가득한 이 기술은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은 연관이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하고, 에너지를 얻는, 이 단순하면서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장(腸)’은, 수많은 전기적 신호와 생리적 파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말을 못 하는 아이가 몸짓으로 감정을 전하듯, 우리의 장도 늘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Cajal 세포’라는 장내 특수세포가 만들어내는 느린 파형(slow-wave)을 수십 개의 채널을 통해 동시에 분석하고, 시간과 공간상에서 이 신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정밀하게 기록한다. 이를 통해 장의 운동성이 정상인지, 혹은 병적으로 느려졌는지, 비정상적인 리듬이 존재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 이 기술은 특히 만성 소화불량, 과민성 대장증후군, 기능성 소화장애 등 명확한 진단이 어려웠던 질환들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술이 단순한 진단을 넘어서, 장 기능 상실과 칼슘 변화, 비정상적 전기활동과의 연관성까지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장이라는 하나의 ‘기관’을 넘어, 장을 둘러싼 신경계와 신호 네트워크, 전신 건강과의 상호작용까지 탐색하게 된 것이다.
뉴질랜드는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의료기술 분야에서는 지속적인 도약을 이뤄내고 있다. 특히 인간 중심의 연구 철학과 기술의 임상적 활용 가능성을 중시하는 뉴질랜드의 연구 환경은, 이번 장내 다채널 지도화 기술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오클랜드 바이오엔지니어링 연구소는 공학과 의학, 수학과 생물학이 융합된 다학제적 연구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해상도 생체 신호 분석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는 ‘작지만 강한 나라’ 뉴질랜드가 보여주는 조용한 힘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생명 또한 그 소리를 존중받는다. 정적 속에서 장의 소리를 듣고, 느린 리듬 안에서 병의 실마리를 찾는 기술. 그것이 뉴질랜드가 전하는 의료의 철학이다.
한편 한국 역시 세계적인 의료 강국으로서 발돋움해왔다. 특히 인공지능(AI), 로봇수술, 디지털 헬스케어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K-바이오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시장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서울대병원, 연세세브란스, 삼성서울병원 등 세계적 수준의 병원들이 연구와 임상을 동시에 수행하며, 의료기기 개발도 활발하다.
그러나 위장관의 미세 신호를 고해상도로 분석하고, 장의 전기생리학적 지도를 그려내는 기술 분야는 아직 고급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이 분야는 연구지원과 융합적 접근이 절실한 영역이며, 뉴질랜드의 모델은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국의 빠른 기술 개발력과 산업화 능력, 그리고 뉴질랜드의 정밀의학 중심 연구와 융합적 사고방식이 만난다면, 우리는 세계를 선도하는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함께 구축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미 정형외과, 뇌신경과, 심장내과에서 축적된 전기생리 진단 경험이 위장관 분야로 확대된다면, 고령화 사회에서 급증하는 소화기 질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민 건강의 근간이 되는 1차 진료와 건강검진 체계 속에 이런 고해상도 분석 기술이 통합된다면, 예방 중심의 보건의료 모델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단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질병을 미리 예측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의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때때로 몸이 보내는 미묘한 신호를 무시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건강은 몸이 들려주는 아주 작은 소리들에서 시작된다. 뉴질랜드의 한 연구팀이 보여준 위장관 다채널 지도화 기술은, 그러한 소리를 과학의 언어로 바꿔주는 놀라운 도구다. 그리고 이 기술은, 인간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돌볼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길이다.
한국이 이 길 위에 함께 선다면, 단지 기술을 수한국이 이 길 위에 함께 선다면, 단지 기술을 수출하고 수입하는 관계를 넘어, 생명과학의 새로운 문명을 함께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장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몸의 이야기를 해독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과학.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출처 : 글로벌 비즈 뉴스(http://www.gbnews.kr)
뉴질랜드지회 박춘태 기자